“저는 한국인이 아니라는 말은 해본적이 없고 한국인이라는 것에 아주 큰 자부심을 갖고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나는 한국인 외교관이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어요 (오영열)”
“나는 한국인이다 (정승영)”
“저는 한국계 호주인이다. 코리안 오스트레일리안이라고 늘 자랑스럽게 얘기를 하고 저는 요새도 항상 호주 국기와 태극기가 있는 뱃지를 달고 다닙니다.” (승원홍)
1972년 멜번에 이민 온 오영열 태권도 사범
1965년 당시 대학생이었던 청년 오영열은 잭 로진스키라는 호주인에게 태권도를 가르친 것이 계기가 돼 호주로 이민을 오게 됐습니다.
“제가 다니던 태권도 도장에 한국 체육관인데 거기에 외국 사람이 오면 제가 다 담당해서 가르쳤어요”
“제가 그때 월남에 태권도 교관으로 월남전에 가 있었는데 그때 유엔군 사령부로 편지를 해서 찾을 정도로 나를 필요로 했어요. 그래서 제가 초청을 받고 호주에 태권도 관장으로 왔습니다. 제가 그때 27살이었습니다.”
호주 경찰들의 무술교육을 위해 호주로 초청받은 오영열 씨는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약속한 상태에서 황급히 호주로 향해야 했습니다.
“약혼만 하고 와가지고 여기 와서 결혼을 했어요.”
“지금 집사람이 6개월 후에 도착해 가지고 73년 3월 말에 결혼을 했습니다.”
오영열 씨는 1970년대만 하더라도 호주에서는 한국인은 물론 동양인을 만나는 것조차 어려웠다고 말합니다. 특히 도시가 아닌 시골이라면 더욱 그랬죠.
“캐라반 파크에 텐트를 치고 슈퍼마켓에 맥주를 사러갔는데 저는 차를 지키고 친구가 맥주를 사러 들어갔어요 그런데 제 주위로 원주민 40~50명이 모였어요. (아시안을) 처음 보는가봐요. 그래가지고 내 콧구멍까지 들여다 보는거예요. 밑에서 까맣게 모여가지고 그래서 제가 태권도 기합도 좀 쎄니까 기합을 한번 질렀더니 그냥 개미가 도망가듯이 다 도망가는 것 있죠. 아시아인을 처음 보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1972년 멜번에 이민 온 오영열 태권도 사범 Source: Supplied
1975년 멜번에 이민 온 바이올리니스트 정승영
바이올리니스트 정승영 씨는 호주 멜버른 심포니 오케스트라 오디션에 뽑힌 호주 최초의 동양계 종신 단원입니다.
한국에서 음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음악 공부를 계속하던 중 호주 ABC 방송국의 오디션에 참가하게 됐습니다.
“75년도에 우리 아내랑, 아들은 그때 뱃속에 있었습니다. 멜번 심포니 오케스트라 초청으로 오게 됐구요”
“제가 75년도에 호주 동양인 최초로 종신 단원으로 일을 하게 됐습니다.”
“29살에 결혼을 했고 그 다음에 30에 왔네요.”
지방 연주를 갈 때마다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다녔던 정승영 씨는 사람들이 동양 아이인 아들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다고 말합니다.
“멜번 심포니 오케스트라 지방 연주를 가면 우리 아들도 데리고 다녔거든요. 왜냐하면 애를 집에 혼자 놔둘수가 없으니깐 부인도 같이 가고 그런데 지방에 가면 아주 신기하게 쳐다 봤었어요. 동양인 어린애를 처음 보는 사람들이 아주 신기하게 봐서 와서 만져도 보고 가까이 쳐다도 보고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1975년 멜번에 이민 온 바이올리니스트 정승영 Source: Supplied
1982년 시드니로 이민 온 승원홍 이사장
호주한인공익재단 승원홍 이사장은 1979년 대한항공 지사장으로 처음 시드니에 도착했고 1982년 다시 호주로 이민을 왔습니다.
“3년 이후 한국으로 발령받아서 들어갔다가 조금 일찍 퇴직을 하고 호주로 정식 이민자로 들어오게 됐는데 그때가 1982년 12월 달에 들어왔습니다. 들어올 당시에 가족은 제가 1975년에 결혼을 했고 아내와 세 자녀, 6살, 3살, 2살 짜리, 막내 2살짜리는 1980년도 제가 여기에서 주재원 생활할 때 시드니에서 태어났죠.”
승원홍씨는 1982년 당시 호주에는 한인 동포가 약 8,000명 정도였다고 설명합니다. 40여년이 지난 지금 호주 통계청의 최근 인구 조사에 따르면 2016년 기준 호주에 사는 한국 출생자 수는 11만 명이 넘습니다.
“1982년 9월 시드니총영사관이 발행한 호주동포현황을 보면 1980년대 초에 2차 사면령으로 가족 재결합이 완료가 되고 호주내 한인동포 수 8,000명, 시드니 6,000명 정도로 추산이 됐고 멜버른 쪽에는 주로 학계 또는 예술계, 태권도 사범들이 많이 정착한데 비해서 여기 시드니 쪽에는 자영업을 하시는 분들이 많았고 대부분은 나름대로 수입이 좋았던 용접이나 건설 용역이나 청소 이런쪽으로 많이들 자리를 잡았죠.”
1982년 시드니로 이민 온 승원홍 이사장 Source: Supplied
한호 수교 60주년
2021년, 한국과 호주가 외교 관계를 수립한지 60주년을 맞았습니다.
국가 간 외교와 국방 관계뿐만 아니라 인적 교류 또한 더욱 가까워졌고 호주에 사는 한국계 이민자의 힘과 영향력 역시 그 어느때보다 확장되고 있습니다.
한호 수교 60주년을 맞아 최초의 한인 이민자 인식 조사를 실시한 멜버른 대학교의 송지영 교수는 설문 조사에 참여한 호주 한인 동포 중 이민 1세대들은 대다수가 거의 매일 한국 음식을 먹고, 일주일에 한번 한국음식 장을 보고, 한국 드라마를 보고, 한국 음악을 듣고 있다고 말합니다.
한인의 정체성을 음식이나 드라마로 실현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제 인터뷰에서 이런 질문을 드렸어요, 호주에 몇십년을 살았지만 이럴때 역시 난 어쩔수 없는 한국인인가보다 라고 느낄때가 언제냐 라는 질문에, 대부분이 한국음식을 먹을때라고 답하셨어요.
오영열 씨 역시 거의 매일 한국 음식을 먹고 있다고 말하는데요, 하지만 이민 초기, 호주에서 한국 식재료를 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김치를 담궈도 한국식 그런 배추가 없었어요. 멜번에는 무라든지 배추가 없고 간혹 콩나물을 리틀 버크 스트리트 차이나 타운에 가면 가끔 콩나물을 살 수가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병식 씨라고 시드니에 계신 유도 사범님이 계셨는데 멜번에 살다 가셨죠. 그분이 스프링베일에 집을 처음 사셔 가지고 마당에다가 배추를 심었어요. 배추가 하나씩 자라면 그냥 뽑아가지고 배추국도 끓이고 무쳐 먹던 생각이 납니다.”
정승영 씨도 이민 초기 호주에서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고 회상합니다.
“그 당시에 배추가 없어가지고 양배추로 김치를 담궜었죠. 소꼬리는 그 당시에 10센트였고, 갈비는 그냥 그 사람들 버리는 것을 집에 개 준다고 하고 갖다가 먹었습니다.”
승원홍 씨는 한국 밥상을 유난히 그리워했던 한국 출신 입양아인 한 어린아이의 이야기를 이렇게 전합니다.
“입양 부모가 한국에서 아이를 데려왔는데 계속 우는 거예요. 그때까지만 해도 호주인들이 한국에 대한 정보도 많지 않았고 이런 상황에서 저한테 전화가 왔어요. 얘가 계속 운다고. 그래서 보모랑 있다가 와서 그렇지 않겠냐 그러니까 잘 좀 달래라 뭐 그러던 중에 또 전화가 온거예요. 애가 막 우는 소리가 들려요 세살 정도니까 제가 그러면 전화를 좀 바꿔달라고 그랬죠 제가 이제 한국말로 “상구야” 불렀더니 이 아이가 “밥줘” “밥 달라고” 그러면서 막 우는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 엄마하고 다시 전화를 바꿔서 애가 밥을 달라그런다. 밥이 그 라이스 한국갔을때 그런 것 봤지? 봤다 이거예요.
차이니즈 그로서리 그런데 가면 라이스가 있으니까 그거 사다가 물을 적당히 넣고 이렇게 끓여서 주면 그게 밥이라고 내가 퇴근길에 회사는 시티에 있었고 집은 윌라비에 있었어요. 저는 웨스트 핌블에 살았고 퇴근길에 들러서 가마 하고 그런 적이 있는데 그래서 제가 그 얘기를 해주고 나서 이제 전화를 끊고 많이 울었습니다. 울면서 제가 상구를 위해서 기도를 했는데 아이고 하나님 저도 뭐 새로 이곳에 와서 사업을 하면서 열심히 합니다만은 제 사업 안돼도 좋습니다 저 기브업 할테니까 대신 상구 호주에서 잘 세틀하게 해 달라고 그렇게 기도를 한 적이 있어요.”
호주인 대부분이 한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조차 몰랐던 1970년대와 80년대. 그리고 당시 이민을 온 한인동포 1세대. 그렇게 60년이 흐르면서 한국은 몰라보게 달라졌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 정승영 씨는 1970년 대 호주인들이 한국에 대해 갖고 있던 이미지는 전쟁이 일어났던 가난한 나라였을 뿐이라고 설명합니다.
“한국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나라인데 6.25전쟁이 있었던 나라, 또 불쌍한 나라 그런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오영열 씨 역시 당시에 호주 사람들은 한국을 잘 몰랐다고 말합니다.
“사실 그때 호주 사람들이 한국을 몰랐어요. 한국 그러면 한국이 어디있느냐? 그게 재팬하고 붙어있는 나라냐? 중국하고 붙어있는 나라냐? 잘 몰랐어요. 호주군으로 한국에 갔던 분들은 한국을 알지만 한국 자체에 대해 잘 몰랐던 호주 국민이 아마 과반수일 겁니다.”
승원홍 씨는 1970년대와 1980년대 호주인들은 지금의 미얀마 사태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한국을 바라봤다고 말합니다.
“1979년말 1980년초의 일반 호주인들이 한국에 관한 인상은 정말 요즘 치면 마치 미얀마사태와 비슷한 느낌을 갖지 않았겠나 생각을 합니다. 특별히 1980년 5월에 광주사태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때 호주 공영TV, SBS는 말할 것도 없고 전부 호주 공영 TV를 통해서 뉴스에 아주 생동감있는 우리 요즘 미얀마 사태의 반 정부 데모하는 것처럼 극렬한 투쟁을 하는 그런 뉴스들이 계속 방송이 됐거든요. 그때 1980년 5월에 저희 세째 아이가 났는데 그때 저희 어머니께서 제처 산후조리를 도와주려고 여기 시드니를 방문했는데 매일 티비에 그런 뉴스들이 방송이 되니까 그때 우리 어머니가 동대문 시장에서 장사를 하셨는데 야 이거 난리구나. 그걸 보시더니 정확하게 5월 24일 날 우리 막내가 낳았는데 광주 사태가 계속 되니까 결국은 한 달 정도 그냥 보고 그냥 가셨어요. 왜냐하면 일이 어떻게 될지를 모르니까 난리가 날 것 같으니까 그런 정도였습니다. 그게 이제 호주인들이 한국을 보는 상태 그러니까 인권 탄압, 군사 정권, 그런 의미로 오늘날 선진국에서 미얀마 사태를 바라보면서 했던 그런 정도의 느낌을 받지 않았겠나 하는 그런 생각을 하죠”
하지만 이제 한국은 호주의 4대 무역 파트너로 성장했습니다. 오영열 씨는 요즘 호주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이들이 한국을 존경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케이팝이나 이런 등등으로 한국이 굉장히 이제 많이 알려졌고 또 대우를 받는 것 같아요. 무역에서도 한국이 4위인가 그렇잖아요? 호주하고. 그래서 이제 많이 올라갔고 호주 국민들이 좀 존경해 가는 것 같습니다.”
승원홍 씨는 변화된 한국의 위상과 자신이 경험한 케이 드라마의 파워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수용소에 가 계신 분들을 위문하러 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영상을 틀어줘요 계속 영어로 된 것도 틀어주고 제가 그래서 수용소 관계자에게 얘기를 해서 한국에 재미있는게 있다 칼라도 좋고 아무때나 봐도 재밌는 것 그래서 제가 대장금, 영어로 된게 있어요 축약본 그거를 구해다가 제가 디텐션 센터에다가 틀어주라고 했는데 아주 좋아들 했거든요 그런 일이 있을 정도로 한국에 대한 이미지에 전혀 부담감이 없고 거부 반응이 없고 좋아졌다 이렇게 생각이 되고 또 최근에는 호주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이 과거에는 개발 도상국을 거쳐 중진국을 거쳐 선진국 대열로 가는 제조업 수출 국가에서 이제 한류 문화 수출국으로 보고 있고…”
힘겨운 세월을 이겨내고 꿈을 개척해온 호주 이민 1세대
시대가 변하고 한국에 대한 위상 역시 눈에 띄게 올라갔지만 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고국 대한민국에 대한 이민 1세대들의 자부심과 애정일 겁니다.송지영 교수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절반가량이 호주 시민권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 64% 이상이 “나는 한국인”이라고 답했습니다.
멜번대학교 송지영 교수 Source: Supplied
“심지어 30~40년을 사시고 호주 시민이신 분도 본인이 단한번도 호주인이라고 생각한 적 없고, 항상 타지에 사는 100% 한국인이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내 얼굴을 지워서 하얗게 만들수 없고, 한국이 혹은 한인들이 행동이 싫어서 한인을 부정한다고 해서, 제자신이 한인이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더군요. 호주의 주류사회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한인이라는 정체성이 강한 분들이 의외로 많았어요”
호주에 이민 온지 어느덧 50년이 넘었다는 오영열 사범은 그동안 한 번도 자신은 한국인이라는 생각을 잊은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저는 한국인이 아니라는 말은 해본적이 없고 한국인이라는 것에 아주 큰 자부심을 갖고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나는 한국인 외교관이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어요
바이올리니스트 정승영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한국인이다.”
모든 교민들이 한국인의 자긍심을 가져서 각자 처해있는 곳에서 우리 한국사람들의 우수성을 나타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승원홍씨는 스스로를 자랑스런 한국계 호주인이며 어디를 가더라도 호주 국기와 태극기가 함께 담긴 배지를 달고 다닌다고 말합니다.
“호주에 사는 한국 인들은 경우에 따라서 호주와 한국 양 국가 관계 속에서 가교 역할 브릿지 역할을 할 수 있는 특권이 있잖아요. 그래서 그런 특권과 호주는 어차피 다문화 사회로 지향을 해가고 있기 때문에 호주 다문화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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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에 2부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