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오 책갈피: 상실과 기억의 결...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의 '흰'

Edinburgh Hosts The Annual International Book Festival

EDINBURGH, SCOTLAND - AUGUST 17: South Korean writer Han Kang attends a photocall at Edinburgh International Book Festival at Charlotte Square Gardens on August 17, 2016 in Edinburgh, Scotland. Credit: Roberto Ricciuti/Getty Images

한국어와 영어로 만날 수 있는 책. 한강의 '흰 (The White Book)'은 삶과 죽음, 기억과 망각이 교차하는 공간에서 '흰색'이 지닌 감정을 섬세하게 포착하며, 특히 한국어 고유의 아름다움을 시적인 문체로 풀어내어 언어의 미학을 선사합니다.


LISTEN TO
1903 Bookmark_The White Book image

오디오 책갈피: 상실과 기억의 결...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의 '흰'

SBS Korean

23/03/202507:58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은 '채식주의자(The Vegetarian)'와 '소년이 온다(Human Acts)'를 통해 한국 문학의 깊이를 세계에 알렸습니다.

시처럼 아름다운 문체로 존재와 부재의 의미를 탐색하며,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하는 한강의 2016년 작품 '흰'은 작가의 가장 자전적인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한강은 이 작품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썼다“고 밝혔습니다.

'흰'은 2017년 영국에서 'The White Book'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출판되었으며, '채식주의자'의 번역가로 잘 알려진 영국의 데보라 스미스가 번역을 맡아 한강의 독특한 문체와 감성을 섬세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오디오 책갈피!
책 속 한 문장, 삶의 한 페이지.
여러분의 마음 한켠에 작은 책갈피 하나 꽂아드려요. 안녕하세요. SBS Audio 책갈피, 유화정입니다.

어떤 색은 기억이 되고, 어떤 색은 감정이 됩니다. 오디오 책갈피 오늘은 우리의 마음속에 한 조각의 흰빛을 머물게 할 책,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의 '흰'을 만나봅니다.

배내옷 – 내 어머니가 낳은 첫 아기는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었다고 했다. 달떡처럼 얼굴이 흰 여자아이였다고 했다.
Newborn gown – My mother’s first child died, I was told, less than two hours into life. I was told that she was a girl, with face as white as a crescent-moon rice cake.

이 책은 하얀 강보에 싸인 갓 태어난 아기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스물세 살의 어린 엄마는 홀로 진통을 견디며 물을 끓이고 가위를 소독하고, 아이를 위해 흰 천으로 배내옷을 만들었습니다.

마침내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엄마는 탯줄을 자르고 피 묻은 작은 몸에 갓 만든 배내옷을 입혔습니다. 여덟 달 만에 세상에 나온 아기. “죽지 마라 죽지 마라“ 엄마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두 시간 만에 숨을 거둡니다.

아기는 달떡처럼 흰 여자아이였습니다.
한강의 저서 왼쪽부터 채식주의자, 흰(The White Book), 소년이 온다.jpg
한강의 저서 왼쪽부터 채식주의자, 흰(The White Book), 소년이 온다/ bookstagram image
흰 것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한 봄에 내가 처음 한 일은 목록을 만든 것이었다.

책의 첫 머리 첫 문장에서 작가가 밝힌 것처럼 이 책은 프리즘처럼 빛을 흩뿌리듯 모든 흰색을 다양한 감각과 기억으로 연결합니다. 세상 모든 것에서 흰색을 찾고, 흰색과 흰색을 이어가며 그 속에서 삶과 죽음, 그리고 기억과 망각을 마주합니다.

배내옷, 달떡, 안개, 소금, 눈, 흰 도시, 구름, 하얗게 웃다, 백야, 흰나비, 수의...
예순 다섯 개의 흰 것을 불러내며 인간 안에 힘 있게 존재하는 결코 더럽혀지지 않는 것, 무엇으로도 훼손되지 않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작가는 흰 것들의 목록을 만들고도 이 단어들을 들여다보는 일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어려워 내내 글쓰기를 미뤘습니다. 그러다 낯선 도시로 옮겨 살면서 이 책을 쓰기 시작했노라 고백하는데요.

2016년 5월에 출간된 '흰'은 작가가 폴란드에 머무는 동안 완성한 작품입니다. 한강은 2014년 5.18 광주 민주항쟁을 다룬 '소년이 온다'를 출간한 뒤 같은 해 8월 열네 살 아들아이와 단둘이 이민 가방을 끌고 낯선 도시 바르샤바로 떠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폭격으로 95%가 파괴되었다가 재건된 도시. 그곳에서 작가는 그 흰 도시와 닮은 한 사람을 떠올립니다. 희고 달떡 같았던 아이. 세상에 태어나 단 두 시간만 머물다 떠난 바로 자신의 친 언니를.

그리고 그 흰 도시에서 다시 살아난 건물들처럼 어쩌면 잊혀졌을지도 모를 존재를 기억하며 글을 써 내려갑니다.
16-han-kang-deborah-smith.w704.h396.jpg
'흰'의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와 작가 한강
수필인 듯 시인 듯 여겨지는 이 자전적 소설 속의 흰색의 느낌은 고귀함이기도, 죽음이기도, 때로는 작별이기도 하며, 때로는 작가가 삶 위에 덧입힌 막연한 감정이기도 합니다.

삶은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 그 사실을 알면서 걸을 때 내 이마를, 눈썹을, 뺨을 물큰하게 적시는 진눈깨비. 모든 것은 지나간다. 그 사실을 기억하며 걸을 때 안간힘을 다해 움켜쥐어온 모든 게 기어이 사라지리란 걸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작가는 새로 빨아 바싹 말린 흰 베갯잇과 이불보, 흰쌀로 밥을 지어 흰 김이 오르는 걸 보고도 또 어떤 감정에 잠기는데요. 삶과 죽음이 함께 스며든 '흰'이라는 색. 그것은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자 우리 안에 살아 숨 쉬는 빛일지도 모르지요.

작가는 말합니다.

“한국에서 흰색을 말할 때, '하얀'과 '흰'이라는 두 형용사가 있다. 솜사탕처럼 깨끗하기만 한 '하얀'과 달리 '흰'에는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함께 배어있다.”

작가의 말처럼 이 책은 솜사탕처럼 새하얀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이 배어있는 '흰'의 이야기 입니다.

SBS 오디오 책갈피.
오늘은 우리말의 결 고운 문체로 삶 속에서 마주하는 여러 순간의 흰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책,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의 '흰' 함께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한켠에도 작은 책갈피 하나 꽂아 드렸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유화정이었습니다.
LISTEN TO
1203_Bookmark_Almond.mp3 image

오디오 책갈피: 감정을 배우는 소년, 그리고 우리 모두의 이야기…'아몬드'

SBS Korean

15/03/202507:29
LISTEN TO
korean_03052025_audio bookmark_Flying Hen image

오디오 책갈피: 우리의 꿈은 지금 어디쯤 있나요?…'마당을 나온 암탉'

SBS Korean

08/03/202507:32
호주 공영방송 SBS(Special Broadcasting Service) 한국어 프로그램의 과 을 팔로우하세요. 와 에서 SBS Audio 앱을 다운로드할 수 있습니다.

매일 방송되는 한국어 프로그램 전체 다시듣기를 선택하시려면 을 클릭하세요. SBS 한국어 프로그램 팟캐스트는 에서 찾으실 수 있습니다. 


Share